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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면을 보며

한홍구(Han Hong Goo) | 성공회대 교수

어떤 상황이나 사람과 ‘직면’한다는 것은 최소한 불편하고 어쩌면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이다. 나 자신도 눈에 힘이 들어가야 하니 자연스럽지 않고, 이 불편한 상황이 어서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게 된다. 불편하거나 불쾌하기는 상대방도 마찬가지 일거다. 오죽하면 ‘눈깔아’란 말까지 나왔을까. 많은 사람은 어떤 불편한 상황과 ‘직면’하기보다는 눈길을 살짝 돌려버린다. 눈길을 돌려버리는데 딱히 이유가 필요할까? 그저 바빠서, 귀찮아질 것 같아서, 휘말리기 싫어서, 나한테 이익이 되지 않아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감당하기 힘들어서, 불편해서, 괴로워서, 무서워서 그 순간을 지나가 버린다.

어떤 상황과 ‘직면’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적 행위이지만, 다른 행위로 이어지는 과정적 의미를 갖기도 한다. 어려운 문제와 기껏 ‘직면’했지만, 금방 눈깔아 버릴 수도 있고 불편한 상황에서 뒷걸음쳐 물러나거나 시선을 돌리며 종종 걸음으로 지나가버릴 수도 있다. 반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처지를 마음속으로 공감하며 자기가 선 자리를 지키며 팽팽한 ‘대치’ 상태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고, 어느 한 쪽이 ‘대치’의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상황 속으로 뛰어들면서 치열한 ‘대결’로 비화하기도 한다.

역사는, 그리고 그 역사의 끝자락에 붙어있는 오늘을 사는 우리는 현실과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기껏 도망을 쳐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고, 눈길을 돌려본들 물끄러미 시선에 잡히는 풍경과 사람들도 결코 편하지 않다. 영어권에서는 “I'm fine, and you?”란 인사를 입에 달고 살지만, 실제의 삶속에서 삶이 편하고 괜찮은 사람은 거의 없다. 인간이란 존재는 불편한 현실과 직면하지 않는, 않아도 되는, 않는 것이 현명한, 않아야 하는 수천가지 이유를 만들어내며 산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꾸 불편한 현실과 대면하라고 부추긴다. 더 심한 사람들은 십 수년도 아니고 수십 년 전에 있었던 ‘나와 상관없는’ 일을 가져다가 눈앞에 들이민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도 감당하기 힘든 데 말이다.

이번 ‘직면’ 전시에 나온 이재갑과 손승현과 이강우의 사진이 담고 있는 것은 지금 당장 굴삭기에 파괴되는 강정마을의 구럼비 바위도 아니고, 김진숙이 하루하루 날짜를 더해가며 버티는 85호 크레인도 아니고, 토건족의 욕망이 꿈틀대는 4대강 공사현장도 아니다. 대한민국의 절대다수 구성원들에게 낯선 곳일 수밖에 없는 일본의 강제징용 현장, 그냥 잊혀진 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애써 지워버린 혼혈인들, 도대체 수십 년간 그런 사람들이 있었는지도 몰랐던 비전향 장기수들, 이제 초등학생들에게는 애써 설명해주어야 할 유물이 되어버린 연탄의 원재료를 캐내던 탄광촌 풍경이 이재갑, 손승현, 이강우 세 작가가 ‘직면’ 전시를 위해 굴곡 많던 한국현대사에서 불러낸 모습이다.

한국의 현대사는 참으로 다사다난했다. 근대란 것이 워낙 정신 사나운 것이지만, 우아하게 ‘압축적 근대화’라 불리는 한국의 근대에서는 김수영 식으로 표현한다면 ‘제 정신을 갖고 사는 놈을 찾아 볼 수 없다’ 할 정도로 사람들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 한국의 현대사는 해마다 전환기였고 달마다 격동기였다. 어느 해고 ‘위기’, ‘대란’이 빠진 적이 없었다. 딱 100년전 나라를 뺏기고 식민지로 전락했던 한국은 분단과 전쟁과 학살과 군사독재와 민주화운동과 산업화와 노동운동의 격랑을 숨 쉴 틈 없이 겪었다. 그리고 지금 국가로서의 한국은 세계 10위권 이내에 드는 어마어마한 부자나라가 되어버렸다. 보통 국민들은 돈이 없고, 젊은이들에게 희망이 없어서 그렇지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은 “내가 제일 잘나가”를 구가하고 있다. 2차대전이 끝났을 때 식민지 지배를 벗어나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세계 자본주의의 최첨단을 걸었던 런던이 인구 백만에서 인구 천만으로 팽창하는데 3~400년이 걸렸다면, 서울은 딱 40년 만에 천만 고지를 돌파했다. 어느 나라나 ‘근대’라는 시기에 경험한 속도감은 시골영감이 청룡열차 탄 것과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는 이 청룡열차의 속도가 다른 나라보다 몇 배 빨랐다는 뜻이다. ‘주마간산’과는 비교가 되지도 않게 빠르게 지나가 버린 역사 속에서 우리는 뭐 하나를 제대로 ‘직시’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유난히 울퉁불퉁했던 우리 역사에서 직시해야 할 것이 어디 한두 가지일까? 이재갑과 손승현과 이강우가 내놓은 작품들이 굴곡 많은 한국현대사를 다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작가들은 식민지 지배와 분단과 산업화의 첨예한 단면을 아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들이 보여주는 현장은 시간이 정지해버린 듯 한 먼 과거 속에 머물러 있다. 사람들의 모습도 지금 이 순간 첨예한 역사의 주역이라기보다는 한 때의 시대적 격랑이 마음과 몸에 짙은 흔적을 남겨놓은 그런 사람들이다. 역사란 것은 원래 이긴 사람의 편에 서는 고상한 물건이었던지라 패배자, 소수자, 찌질한 자, 쩌리, 루저의 이야기는 잘 담지 않았다. “이대로는 눈을 감을 수 없소”라 몸부림 쳤지만, 한 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버린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며, “그걸 어떻게 말로 다 해요...”라며 어깨만 들썩이며 울다 말문을 닫아버린 사람도 어디 한둘이겠는가.

이재갑과 손승현과 이강우 세 작가의 공통점은 한국근현대사의 역사적 궤적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들의 작품을 잘 뜯어보면 이들은 모두 ‘맥락’을 중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긴 단순한 호고벽이 아니라 역사를 끊임없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로 이해하는 사람에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맥락을 벗어난 오늘은 없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오늘은 없다. ‘지금 이 순간’과 정직하게 대면하려는 사람들에게 오늘의 문제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를 이해하는 작업은 필수적인 일이다. 오늘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역사를 들여다본다면, 그것은 한갓 지적 호기심을 채우는 일을 넘기 어렵다. 현실문제의 역사적 뿌리를 들여다보지 못한 채 해결책을 모색한다면 그저 지엽말단에 매달리다 끝나버릴 것이다. 이들 작가들은 각각 일제시대의 징용 문제, 분단독재시대의 비전향장기수 문제, 산업화시대의 탄광 문제를 깊이 있게 천착했는데, 모두 공통적으로 오늘의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렌즈를 과거의 역사 속으로 또는 역사화된 현실 속으로 돌렸을 뿐이다.

역사란 가락동 청과물시장 같아서 없는 것 없이 과거에 벌어졌던 일들이 다 포괄되어 있다. 어느 누가 넓디넓은 세상의 헤어날 수 없이 많은 굽이굽이에서 일어난 일을 다 기억할 수 있을까. 한 개인이나 집단에게 죽어도 잊을 수 없는 강력한 사건도 시간이 지나면 원래 잊혀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 누군가가 나서서 ‘잊혀진 것을 찾아서’란 깃발을 들고 너무나 평범하고 흔하게 다 알다보니 아무도 기록하지 않아서 잊혀진 것을 찾아내는 일을 업으로 삼기도 한다. ‘잊혀진 것을 찾아서’가 유행한다지만, 잊혀진 것이 모두다 현실로 불려 올라오는 것은 아니다. 잊혀진 것과 여러 경로로 직면한 사진가, 다큐멘터리 작가, 소설가, 역사가, 시민운동가 등이 있어야 잊혀진 것이 부름을 받을 수 있지만, 이런 사람이 열심히 발품을 판다고 잊혔던 것이 모두 다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사진가나 역사가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잊혀진 것을 복원하려는 사회적 힘을 타지 못한다면 그들의 작업 역시 망각의 담장을 넘지 못하고 말 것이다.

사진의 힘, 이미지의 힘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한 컷의 사진을 보고 그저 “아!”하고 탄식이 나오거나 가슴 깊숙한 곳을 찔린 듯 한 느낌... 이것이 일반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사진의 힘일 수 있다. 그런데 강제징용 현장을 찍은 이재갑의 사진은 그야말로 “아는 만큼 보인다.” 사진의 설명을 보지 않았다면 바다위로 삐죽이 나온 콘크리트 구조물이 해저탄광의 배기구인지 알 길이 없다. 폭풍우 치던 어느 날 이 배기구로 물이 넘어 들어와 해저탄광에서 일하던 노동자 183명(이중 조선인은 134명)이 고스란히 수장되었다는 기막힌 사연을 그저 사진만 보는 관람객들이 어찌 알 수 있으랴. 덩그러니 바다에 떠 있는 2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이 바다의 가미가제인 10대 소년병들의 인간어뢰(또는 자살모터보트)가 출발하던 곳인 줄 그 누가 짐작하랴. 설명을 보지 않아도 스산한 공포감이 밀려오는 사진도 있다. 시모노세키의 선착장 사진은 공포영화의 촬영지로 쓰면 딱 좋겠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으스스한 곳이다. 지옥이 한때 성업 중이었다가 다른 곳으로 이사가버리고 난 뒤 폐허가 된 건물이라면, 아마 딱 이런 느낌일 것이다. 이재갑 작가도 갑작스런 비로 차 속으로 피했지만, 차 속까지 엄습해온 당시의 공포감에 사로잡힌 채 셔터를 눌렀다고 한다.

작가가 오키나와에 갔다가 이곳에 강제징용 된 조선인들의 사연을 담은 ‘한의 비’에서 고향 주소를 발견한 섬뜩한 사연은 우리네 개인사가 민족의 역사를 벗어날 수 없음을 세포 하나하나까지 느끼게 만든다. 그저 일본 어디로만 알았던 그곳이 바로 할아버지가 끌려갔던 곳이다. 작가에게는 조선청년들이 무자비한 탄압을 받다 잠든 치쿠호 지역이 “평생 잊지 못할 참혹하고 안타까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곳이 어디 이곳뿐이랴. 일본의 철도 침목 하나하나에는 돌아오지 못한 조선청년들의 원혼이 서려있다. 한번 꽂히면 운명처럼 벗어나기 힘든 무엇이 있다. 고향에 가고 싶다던, 엄마가 보고 싶다던 수십 년 전의 지하로부터 아직도 웅얼거리는 그 고통스러운 현장을 작가는 벗어날 수 없다. 15년을 발로 뛰었지만, 작가는 목표의 겨우 삼분지일 남짓 돌았을 뿐이다. 이재갑의 사진은 카메라가 아니라 가슴으로 찍은 사진이다. 관객들도 마땅히 마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분단된 한국은 비전향장기수라는 독특한 인간집단을 낳았다. 남파공작원과 빨치산 출신을 주축으로 약 100 여명에 달하는 이들이 감옥에서 보낸 기간은 평균 31년 4개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장기수인 남아프리카의 넬슨 만델라는 ‘겨우’ 27년을 감옥에서 살았으니 한국에 데려오면 평균에도 미치지 못한다. 수십 년 간 바깥세상과 완벽하게 단절된 채 강제전향의 압박을 견뎌낸 이들의 존재는 민주화 이후 비로소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 역시 분단이라는 역사의 격랑에 휩쓸린 희생자일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주체적인 혁명가였다. 누가 그들에게 혁명에 나서라 등 떠밀지도 않았고, 혁명의 길에 나선 뒤에도 남파공작원이 되거나 빨치산으로 입산하라고 강요받은 것도 아니고, 살인적인 강제전향공작이 가해질 때 누가 그들에게 비전향을 강요한 것도 아니다. 달리 방법이 없었기도 했지만, 그들은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서 비전향장기수가 되어 수십 년 세월을 보낸 것이다. 수구언론은 그들의 주체적 선택은 아랑곳하지 않고 장기수들의 다수가 6ㆍ15정상회담의 결과 북으로 돌아가는 그날까지 이들을 ‘미전향 장기수’라 불렀다.

나도 비전향 장기수들과는 나름 깊은 관계를 맺었고, 수십 명의 장기수들을 상세히 인터뷰하여 여러 권으로 된 구술자료집을 낸 바 있다. 그러다 보니 손승현의 사진 속에 등장하는 장기수 선생님들의 사연을 잘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비전향 장기수는 특별하면서도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북으로 돌아가 가슴에 주렁주렁 훈장을 달고 만세를 부르는 모습은 참으로 낯설기만 하다. 손승현은 그렇다고 비전향장기수들의 일상을 찍은 것도 아니다. 사진 속의 그들은 나름 자세를 잡고 앉아 있거나 서 있다. 그들이 희생자만이 아닌 주체적 혁명가였기 때문일까? 우리만 그들을 직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손승현의 사진 속의 장기수들은 수지침을 놓는 유운영과 먼 곳을 바라보는 고성화의 사진을 제외하고는 모두 카메라를, 하여 우리를 직시하고 있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이종환 선생의 사진이었다. 나이가 많다고 일찍 내보내주어 그렇지 투옥된 날짜로 치면 세계최장기수의 타이틀을 차지했을지도 모르는 분이다. 까까머리 전두환, 노태우가 육사에 들어가던 해 감옥에 들어가 그 둘이 차례로 대통령을 지내고야 바깥 땅을 밟은 일만오천일의 장기수. 나는 큰 기대를 갖고 이종환 선생을 인터뷰했다. ‘정보’의 차원에서 보면 이 인터뷰는 거의 건진 것이 없었다. 전쟁 전의 활동은 오래 되어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시고, 전쟁 중에 유격대원으로 넘어오다가 잡혔으니 선생 스스로 말씀하신 것처럼 선 떨어진 조직원이었고, 뭐하나 내세울 것 없는 실패한 혁명가였다. 40년 간 면회도 한번 없는 곱징역을 살며 운동 나가 꽃밭 만지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니 옥중투쟁의 이야기도 별로 없다. 두 딸을 잃어버린 이야기도, 엄청난 고문을 당한 이야기도 마치 남의 일처럼 무덤덤하게 얘기하시던 선생은 석방되던 얘기를 하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왜 그러세요? 내보내준다는 건데?”라는 내 질문에 선생은 “동지들을 두고 혼자 먼저 나가게 되어 너무너무 가슴이 아팠다고...” 말없이 선산을 지킨 굽은 소나무. 나는 이종환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갑자기 이 보잘 것 없는 수줍은 노인에게 최고의 영광이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남의 집 뒷마당 나무 그늘 속으로 비치는 햇살, 손승현 작가가 대신 선물한 것 같다.

유운영 선생은 창가에 앉아 수지침을 놓고 있다. 비전향 장기수 중에는 침의 고수들이 많다. 수십 년 간 그들은 일체의 의료행위로부터 배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었기에, 침이 유일한 치료수단이었다. 다른 약을 쓰지 않은 몸이니 침의 효과가 있고 없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동료 비전향 장기수들과 자신의 몸을 만만한 ‘실험도구’로 삼아 실습을 거듭했고, 어떤 선생님은 수십 년 동안 자기 자신에게 침을 놓는 자침을 십만 방도 넘게 놓았다며 자랑하기도 했다.

삶의 고단한 계단을 다 내려와 구부정하고 힘 빠진 모습으로 앉아있는 노인. 누가 그를 무려 45년을 감옥에서 보낸 세계 최장기수라고 볼 것인가? 총각해방동맹 위원장이라는 유쾌한 타이틀과 달리 김선명 선생은 이날 따라 너무 처량해 보인다. 혹시 어머니를 뵈러 갔다가 동생네의 거절로 만나지 못하고 돌아온 쓸쓸한 오후가 아니었을까. 선생은 출옥 후 딱 한 번 어머니를 뵈었다. 종잇장처럼 가벼워진 노모는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아들의 얼굴을 만지며 마음속으로 네가 환하게 보인다고 했다. 백살의 노모가 45년 징역 살고 나온 칠십이 넘은 아들을 앉혀놓고 네가 어른 말 안 들어서 그렇다고 타박하는 모습은 참으로 너무나 너무나 ‘한국적’이었다. 한국사회에서 빨갱이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선생의 동생은 딱 한번 어머니를 만나게 했을 뿐, 선생은 어머니를 다시 뵐 수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북으로 송환될 때도 산소에 술 한 잔 올리지 못했다.

이강우의 탄광촌 사진은 탐욕스런 자본주의가 다 파먹고 떠나가 버린 스산한 근대의 모습을 담고 있다. 똑같은 천변풍경을 찍었으면서도 1960년대 구와바라 시세이의 청계천 사진에 담긴 ‘낯선 우리’의 모습은 구질구질한 풍경 속에서도 체온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따뜻하다. 이미 폐광이 되어버린 사북이나 고한과 달리 철암은 전보다 규모는 줄었지만 아직 채광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다. 우리의 선입견 탓일까? 이강우가 찍은 철암천변의 세멘건물 어디에서도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없다. 석탄을 다 파먹어서 사람이 떠나갔다면 덜 서글펐을런지 모른다. 아직도 탄은 엄청나게 남아 있지만 경제성이 없어서 더 팔 이유가 없단다. 사람도 마음이 비어버리면 금방 무너지듯 집도 사람이 떠나면 금방 폐가가 된다. 이곳은 한때 사람들로 북적이다가 이제 모두 떠나버린 곳이다. 비어 있는 곳, 그런데 비어있는데 무겁다. 이강우의 사진은 비어있음의 무거움은 우리의 마음속으로 파고든다.

1980년대는 ‘사북사태’로 문을 열어 동구 사회주의 붕괴의 충격을 멍하게 바라보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 엄청난 질풍노도의 시대가 가버렸을 때, 우연이었겠지만 연탄의 시대도 끝이 났다. 6월항쟁이 끝난 직후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7ㆍ8ㆍ9월 노동자투쟁이 일어났고, 소득수준의 향상과 주거문화의 변화는 주유종탄(主油從炭)을 가속화시키며 석탄을 변방으로 몰아냈다. 당연한 일이지만 석탄으로 먹고 살던 사람들의 삶에도 일찍 황혼이 드리웠다. 그의 다른 사진과 달리 탄광촌 풍경을 찍은 작품에서는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가 애써 카메라에 담은 풍경도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지만, 강산이 변하는데 사람이야 오죽하랴. 변하지 않는 것은 상처뿐이다. 폐광촌 살린다고 휘황한 네온의 카지노가 들어선들 땅속 깊이 거미줄처럼 퍼진 갱도들이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될 길은 없다. 떠나간 사람, 남은 사람의 마음속에 남은 상처도 그냥 그대로다. 새로운 상처가 더해져 옛 상처를 잊을 뿐이다. 땅 속 깊이, 마음 속 깊이 상처를 입고 사는 사람들을 재개발의 욕망으로 끌어당기고, 날로 심해지는 진폐의 기침소리를 뒤로 물리고 이제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휘황찬란한 카지노는 눈에 핏발선 도박꾼을 불러들인다. ‘석탄산업합리화!’ 근대는 이렇게 모든 것을 ‘합리화’한다.

한국현대사는 외마디 비명 말고는 말이 설 자리가 없었다. 그저 불문곡직 잡아가고 죽이고 줘 패고 밀어붙이고 때려 부스며 여기까지 달려왔다. 이재갑, 손승현, 이강우는 각각 식민지지배, 분단, 산업화의 현대사를 이미지에다가 말의 힘까지 빌려 우리로 하여금 ‘직면’하게 한다. 이재갑은 무심한 풍경을 이미지로 남기는데 그치지 않고 장소의 역사성에 대한 설명을 담은 책을 여러 권 펴냈다. 손승현은 아예 사진 위에 비전향장기수 할아버지들이 남긴 글을 써버렸다. 이강우 역시 사진만으로는 이 기막힌 ‘합리화’를 제대로 보여주기 어려웠나 보다. 그는 수많은 사진이외에도 50분짜리 영상과 100여 편의 텍스트를 남겼다. 시각예술이 가진 ‘불립문자’의 오랜 ‘전통ㆍ악습ㆍ규범ㆍ버릇ㆍ고집ㆍ규칙ㆍ담벼락ㆍ합의’는 적어도 여기 ‘직면’전에서는 유효하지 않았다. 너무나 오래 동안 하소연할 곳이 없던 피해자들이 “그걸 어떻게 말로 다 해요”라며 울음을 터뜨리듯, 작가들도 “그걸 어떻게 한 프레임에 다 담아요”라고 하소연하는 듯하다. 말할 수 없던 한국현대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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