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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야만

Park Pyong-Jong | PHOTONET | 2010. 07.

《통일의 집》연작에서 비전향 장기수의 인권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 이래 손승현은 줄곧 문명사적관점에서인간의거취에주목한작업을진행해왔다.《North & South 코리안 아메리칸》에서는 아메리카 대륙에 이주하여 자신의 혈통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한국인, 즉 코메리칸의 초상을 담았고, 《원은 부서지지 않는다》에서는 인디언 보호 구역 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모습에천착했다. 이 세 편의 작업을 통해 손승현이 줄기차게 던지고 있는 질문은 곧바로 문명사의 치부와 맞닿아 있다.

문명의 구축은 인간의 삶에서 혼란과 무질서를 걷어내고 규범과 질서를 부여하는과정이었다. 노동을통해생산성을높여빈곤을몰아내고본능과욕망을 다스리는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 야만과 폭력에서 멀리 있는 공동체를 실현하는 것이 문명의 목표였다고 말할 수 있다. 문명의 진행 방향은 어느 정도 이런 목표에 근접한 측면이 있다. 문명사의 어느 시기보다도 높아진 생산성, 풍부한 물적 재화, 복잡한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시켜 주는 각종 제도, 다양한 가치의 발견과 이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 등을 보면 문명의 앞날이 그리 어둡지만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이런 긍정성의 뒤편에는 문명사의 치부가 고스란히 은폐되어 있다. 문명 이전의 폭력보다도 훨씬 난폭하면서 동시에 교활하고 음험한 야만성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이다. 실상 문명은 야만을 몰아내는 과정이었다고 자처하지만 둘은 한 번도 온전히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야만은 문명의또다른얼굴이라고까지말할수있다. 문명의 야만성이 더욱 심각한 까닭은 그것이 문명의 전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할 희생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하여 문명은 자신의 야만성을 종종 망각하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해 왔다. 그렇게 문명은 자신의 야만성을 은폐하고 역사에서 누락시킨다. 누락된 역사, 말하자면 알려지지 않은 역사 또한 문명의 또 다른 모습이라 하겠다.

누락된 역사의 지면을 가득 채울 내용이 문명의 횡포에 희생당한 개인들의 이야기일 것임은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거대한 집단의 논리 앞에 개인은 그저 무력할 뿐이어서 국가나 민족과 같은 거대 공동체를 지탱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앞에서 개인은 설 자리가 없다.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권이라는 가치의 발견이 근대국가의 탄생과 맞닿아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국가는 자신을 구성하는 개인들을 지켜내기 위해 탄생했다고 말해야겠지만 실상은 반대인 경우가 다반사이다. 국가는 개인을 통제하고 억압하고 때로는 희생시킨다. 국가를 위해 자발적인 희생을 선택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개인은 국가의 횡포에 고스란히 당한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이 국가의 보호 아래 놓여있어침해당할까닭이없다면무엇때문에이러한가치를지켜내야한다고 부르짖겠는가. 요컨대 인간의 존엄성은 상시적으로 위기 상태에 놓여있거나 훼손당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인권은 오히려 국가로 인해 위해를 입는다. 그리고 인권을 유린하는 주체는 항상 국가라는 무형의 집단이었다.

서로 다른문명의 충돌, 더욱 정확히는 타문명의 정복과정에서 인간의 야만은 더욱 횡포해지고 희생의 범위도 커진다. 예를 들어 토도로프Tzvetan Todorov에 따르면 16세기 초반까지 북아메리카의 인구는 8천만이었는데 16세기중엽에는 천만으로줄었다. 멕시코의 경우는 2,500만인구 중 백만명만이 살아남았는데, 이는 서구인의 아메리카 정복 과정이 곧 학살의 과정이었음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이토록 잔악한 살육을 통해 구축한것이 문명이라면 인간의 역사는 피를 먹고 자라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문명의 역사는 살육의 역사이자 자신의 범죄를 은폐해 온 역사인 셈이다. 이런 문명사의 치부를 드러내 밝히고 속죄하는 모습을 보기란 어렵다. 속죄란 강요나 설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요청에 따라자연히터져나오는것이다. 그런점에서 문명은 윤리를 알지못한다. 따라서 하나의 문명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로서의 윤리적 개인은 자신이 속한 문명의 범죄 행위를 낱낱이 기억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 손승현의 작업은 그런 의무를 지켜나가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무고한 범법자

《통일의 집》은 한국정부가 사상범으로 분류하여 장기간 복역했던 비전향 장기수들의 모습을 담아낸 초상 작업이다. 비전향 장기수 문제는 한국 현대사에서 인권 탄압의 가장 극명한 사례들 중의 하나로 남게 될 사안이다. 이데올로기를 잣대로 삼아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가치를 유린해온 경우라 할 수 있다.

비전향 장기수로 분류되었던 이들의 유형은 매우 다양하다. 이들 중에는 해방 이후 좌익 활동을 했던 전력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고, 휴전 이후 북에서 남파된 정치공작원도 있다. 또한 반정부 활동을 했던 인사들을 탄압하기 위한 방편으로 군부 정권이 조작해 낸 간첩단 사건 관련자들도 있다. 이들을 사상범으로 옭아맨 죄목은 국가보안법이며, 사상전향서를 쓰기를 거부하여 장기 복역을 하게 된 경우이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들이 품고 있는 사상은 국가의 안위를 위태롭게 할 수 있으며, 이 위험한 사상을 바꾸지 않고서는 남한 땅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실상 이들이 지녔던 사상에는 수많은 편차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에서는 남북이 서로 다른 이념을 채택하여 분단을 맞이하기 이전부터 사회주의자였던 이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영문도 모른 채 사회주의자로 규정되었던 이들이 있다. 또한 어떠한 사상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버릴 것도, 바꿀 것도 없었던 이들이 있다. 한편 사회주의를 적대시하는 체제에서 나고 자랐지만 사상의 자유에 따라 자발적으로 사회주의를 선택한 이들이 있다. 이 다양한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조리 위험한 사상범으로 규정되었고 전향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사상을 바꾼다함이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을 근본적으로 부인해야만 가능하지않은가. 왜냐하면 사상이란 개인의 가치관과 세계관, 즉‘나’라는 개인이‘세계’라는 타자와 맺는 관계를 결정하는 가장 근원적인 태도를 뜻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상의 전향을 강요하는 것은 개인을 바꾸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가장 심각한 인권 침해가 여기에 있다. 특정한 권리에 대한 침해가 아니라 개인의 모든 생각과 행위가 발원하는 가치의 근본을 침해하는 셈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라는, 자신이기를 멈추라는 강요와 다를 바 없다. 개별적인 생각이나 판단은 경우에 따라서 바꿀 수도 있겠지만 생각의 근원을 강제로 바꿀 수는 없다. 불가능한 것을 강요하는 셈이다.

나아가 개인은 자유의지에 따라 원하는 사상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개인의 모든 자유는 사상의 자유에서부터 출발하여 일상의 자유로 확산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근대 국가의 기본 이념을 개인의 자유에서 찾고 있으면서도 사상의 자유를 용인하지 않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결국 사상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국가의 존립 근거를 부정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실상 국가는 이처럼 개인의 자유를 제약함으로써만 통치의 질서를 공고히 할 수 있다고 믿는다. 통치권에 도전하는 개인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각종 수단이 그래서 나온다. 가장 흔히 동원하는 방법은 통치권을 위협하는 개인들을 법질서의 밖으로 배제시키는 것이다. 국가 또한 법의 기초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험한 개인들은 국가의 존립 기반인 법과 배치되며, 그 법 자체를 위기에 빠뜨리는 개인이라고 규정해야 한다. 결국 그들은 국가에 도전하는 개인이 아니라 법에 도전하는 개인이 된다. 법의 이름으로 단죄가 가능한 것도 그 때문이다. 법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서 국가는 어떠한 개인도 처벌할 수 없으므로, 만약 그렇다면 통치 행위 자체가 범법 행위이므로, 처벌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국가는 무고한 개인을 범법자로 규정해야만 한다. 비전향 장기수들은 그렇게‘만들어진’범법자라 할 수있다.


‘국가’라는 괴물

이러한 과정이 법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국가의 폭력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합법적 폭력이 가능한가. 합법적이라 함은 법의 이치를 따른다는 뜻이다. 하여 합법적 폭력이란 곧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법이 허용하는 폭력도 있는가? 법은 노모스Nomos에서, 곧 자연 상태의 폭력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법은 원칙적으로 폭력을 허용하지 않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국가가 합법적 폭력을 자행한다면 이는 비정상적인 법이다. 국가가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법으로부터 국가가 나온다. 어떠한 국가도, 어떠한 통치권자도 법의 이름으로만 통치 행위를 할 수 있다. 이 때 합법적 폭력을 허용하는 비정상적인 법은 법이 아니라 법을 가장한 통치 권력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 권력이 법에 준하는 힘을 지니려면 합법을 가장해야 하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국가를 구성하는 개개인들의 합의다. 원칙적으로 법은 폭력을 허용하지 않으므로 국가의 통치 권력을 위협하는 개인들을 단죄하려면 법 위에 군림하는 초법적 권위를 만들어내야 한다. 국가 구성원들의 암묵적 합의가 이 초법적 권력을 작동시킬 수 있는 기반이되는 셈이다. 이런 합의는 단순한 여론 조작이나 선전, 선동이 아니라 매우 치밀하고 정교한, 그리고 지속적인 교육과 학습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비전향 장기수들에게 국가가 자행했던 합법적 폭력 또한 이런 구조 속에서 나왔다. 우선 통치 권력은 이들을‘위험한’사상을 지닌 개인으로, 다시 말해 국가를, 그리고 그 국가가 세워져 있는 법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자로 규정하여 법의 보호망 밖으로 배제시킨다. 이러한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통치 권력은 그들의 사상이 국가의 존립 기반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국가의 구성원 모두가 이 생각에 공감해야 그들을 단죄할 수 있는 초법적권력이 작동 할 수있다. 이를위해 한국의 통치 권력이 사용해 온수단이 반공 이데올로기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비상식적으로 굴절된 이해가 그렇게 나온다. 사회주의는 불온하고 위험한 사상으로 반세기 이상 낙인찍혀왔다. 그런데 비전향 장기수들 중에는 사회주의와 전혀 무관한 개인, 단지 야만적인 통치 권력에 저항했던 개인들도 있다. 통치 권력의 편에서 볼 때 진정 위험한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그 권력에 도전하는 순박한 개인들이었다. 이 위험한 개인들을 초법적 권력을 통해 법의 이름으로 단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반공 이데올로기였다. 부도덕한 권력에 저항하는 개인들을 정상적인 법으로는 심판할 수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결국 그들은 통치 권력이 만들어 낸 비정상적인 법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당한 자들이며 자신이 나고 자란 국가로부터 추방당하여 거처를 잃어버린 버림받은 생명들이다. 자신이 가진 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국가에 온전한 거처가 어디 있겠는가. 하여 그들은 어디에 있건 모든 곳이 타지이다.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물리적인 감시는 차치하고라도 실질적으로는 추방령을 받은 것과 다를 바 없기에 이 땅 어디에도 그들이 발붙일 곳은 없는 셈이다. 비좁은 독방에서 수십 년간 말을 잊은 채 짐승처럼 살아 온 모진 세월은 어떻게 보상받을 것이며, 사랑하는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는 또 어쩔 것인가. 우리는 국가라는 괴물을 맹목적으로 신뢰하고 있지는 않은가.

국가 없는 유민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은 또 다른 유형이 있다. 한국을 떠나 아메리카 대륙을 거처로 선택하여 살아가는 일명 코메리칸이 그들이다. 그들의 유형 또한 다양하지만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리적 추방이나 망명이 아니므로 자발적인 선택이라 말해야겠지만 우리 현대사에서 타국으로의 이주는 내몰린 것이나 진배없다. 《North & South 코리안 아메리칸》연작에서 손승현이 관심을 갖고 추적해 나가는 문제가 이처럼 타지로 내몰려 살아가는 국가없는 개인들의 삶이다.

실상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국가는 개인을 지켜주는 보호 장치의 역할을 전혀하지 못했다. 외세의 침탈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희생당하는 개인들을 지켜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외세의 눈치 보기에 급급했던 것이 주권 권력이었다. 한편 국가의 통치 권력은 개인을 힘으로 억누르고 입을 막아 수명 연장에만 급급해 왔었다. 힘없고 무능한 국가, 빈곤하여 개인에게 베풀 것이 없는 국가, 개인을 통치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오만한 국가, 이것이 근현대를관통해온우리국가의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런 국가에 의탁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괴롭다. 국가에 대한 충성도가 아주 높거나, 강인한 의지나 신념을 가져야만 무능하고 부패한 국가의 일원으로 근근이 삶을 버텨낼 수있다. 혹은 주권 권력의 주변부에 속하거나 운좋게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계층의 중심으로 진입한 경우만이 동족의 눈치를 보지 않고 편한 삶을 누릴 수가 있었다. 동족의 곁에서 고난을 함께 감내하기로 작정한 이들은 주권 권력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만 국가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런 국가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만이 있었다. 더 나은 삶을 포기하고 조국에서 식물처럼 살거나, 조국을 버리고 떠나는 것 밖에는 없었다. 조국은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에,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 있기에. 더 나은 삶을 포기한다는 것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므로 국가를 포기한 이들은 삶을 택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선택한 삶이 온전한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 선택은 곧 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버림이 선택이 되는 행위, 버려야만 택할 수 있는 상황을 어느 누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들은 가장 버리기 힘든 것을 버림으로써만 삶을 선택할 수 있었다. 제 아무리 비천한 부모라도 없는 것보다 낫듯이 아무리 가진 것 없고 더러운 조국이라도 없는 것에 비할 바가 못 된다. 하여 조국을 떠나야만 했던 선택은 그들 삶의 절박함에 대한 반증으로 볼 수 있다. 반드시 절박함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욕구에서 비롯되었을지라도 그렇다. 더 나은 삶을 향한 욕망은 삶을 긍정하는 자세와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조국을 떠나 풍요의 땅에 정착한 이들 중에는 그 욕망을 성공적으로 구현한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손승현이 담아 낸 초상은 전자의 경우에 속한다. 그러나 한 번 버린 것을 다시 얻을 수는 없다. 즉 그들에게 더 이상 국가는 없다. 한국인의 혈통을 갖고 있지만 한국이라는 국가의 일원은 아닌 것이다. 다민족 국가에서 살아가는 그들은 사실 그 나라의 구성원이다. 하지만 그들은 대개 그들만의 공동체를 따로 꾸린다. 그 공동체는 몸이 속해 있는 국가가 주지 못하는 것을 대신 줄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받아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국가를 버린, 혹은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의 결핍감이라 하겠다.

《North & South 코리안 아메리칸》연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몇몇의 예외를 제외하면 상당히 밝고 건강한 인상을 풍기고 있으며 자신의 삶에 매우 만족스러워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주거 환경이나 한인 공동체의 환경 또한 양질의 삶을 영위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즉 그들은 조국을 버림으로써 현재의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이 자신의 물질적, 정신적 삶에 얼마나 만족해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들의 삶에 국가가 해준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오히려 국가는 그들을 방기함으로써 유민으로서의 결핍감만을 주었다. 그런데도 이 코메리칸들은 만족스럽게 살아가고 있다.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덕분에 그들의 현재적 삶이 가능할 수 있었다면 그들에게 국가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살육의 역사와 문명의 미래

국가의 일원임에도 국민주권을 갖지 못한 개인들의 문제에 천착했던 작가는 이제《원은 부서지지 않는다》에 와서 삶의 거처조차 박탈당한 뿌리 뽑힌 인간의 문제로 관심을 이동시킨다. 인디언 보호 구역에서 살아가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후예들의 삶을 추적해 나가는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서구인에게‘축복’일 수 있었지만 원주민들에게는‘재앙’이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미국의 역사는 잔악한 학살과 살육으로 점철되어 있다. 15세기 말에 약 500개의 부족이었던 아메리카 원주민 중 절반이 사라졌으며(17세 초 2천만 이었던북미대륙의 원주민은 20세기 초에 와서 25만으로 줄었다. 3세기 동안 99퍼센트가 학살당한 셈이다), 현재 생존해 있는 부족은 274개의 보호 구역에 분산 수용되어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인디언 보호 구역은 미국 내에서 가장 궁핍하고 낙후한 지역일 뿐만 아니라 핵폐기물 저장소와 우라늄 광산이 들어서 있는‘위험지대’이기도 하다. 손승현은‘미래를 향한 말타기’라 불리는 인디언 원주민 후예들의 정체성 찾기 운동에 참여하면서 글과 사진이 어우러진 한 편의 장대한 서사시를 완성하였고, 이를《원은 부서지지 않는다》로 묶어냈다.

이 작업의 줄기는 사우스라코타주에 거주하는 라코타족의 후예들이 1986년부터 시작한‘미래를 향한 말타기’운동에 작가가 직접 참여하여 아메리카 원주민의 현재적 삶을 근거리에서 관찰하고 그들의 뿌리 뽑힌 역사를 연구한 결과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운동은 본래 라코타족의 후예들이 자신의 조상에게 바치는 제의에서 출발하였으나 현재는 고난으로 얼룩져 온 원주민들의 역사를 올바로 인식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함으로써 미국내에서 원주민들의 위상을 높여나가기 위한 현실적인 목표를 갖고 있다. 이 행사는 미군 제7기병대가 라코타족을 무참히 학살한 이른바‘운디드니 학살’을 기리기위한 소박한 제의에서 시작하였다. 이 학살은 아메리카 대륙에 이주해 온 약탈자와 본래 그곳에 문명을 구축하고 있었던 원주민과의 관계를 극명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1890년에 발생한 이 살육에서 여자와 어린아이를 포함한 라코타족 300명 이상이 군대의 무차별 발포에 의해 무참히 희생되었다. 서구의 정복자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직후부터 시작된 인간사냥이 채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정복자의 시각으로 쓴 문명의 역사에서 살육의 역사는 늘 묻히고 만다. 또한 피정복자에 대한 일반의 인식은 오해와 편견으로 물들어 있다. 이 역시 정복자의 자기 정당화 논리가 퍼뜨려 놓은 술책 탓이다. 예컨대 아메리카 원주민은 미개하고 야만적이어서 서구 문명의 이식은 그들을 야만에서 문명으로 이끌어내는 빛과 같았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그러나 3세기 동안 서구의 이주자들은 원주민들이 대대로 지켜 온 삶의 터전을 약탈하고 이에 맞서는 그들을 우월한 무력을 사용하여 황폐한 땅으로 몰아내 온 것밖에는 없다. 실제로 이 광활한 대륙에서 이주자들의 패권다툼이 종결되고 미합중국이 들어서면서그들은 무력을 결집시켜 원주민들을 서부의 바다 끝자락까지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그리하여벼랑까지 몰린 원주민 최후의 항전이 거기에서 벌어진다.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그들의 모습은 미개할 뿐만 아니라 잔인하고 난폭하기 이를 데 없다. 야만적인 원주민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문명세계의 영웅이 그렇게탄생한다. 그러나 기실 진정한 야만은 대륙을 침탈하고 원주민을 무력으로 제압해 나간 이주자들의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한때 대륙의 지배자였던 원주민들은 현재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여 보호구역 내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지역은 미국내에서도 버림받은 땅이자 가장 낙후한 지역이며, 타 지역에서는 법으로 금지된 행위들이 버젓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원은 부서지지 않는다』에 따르면 원주민들의 과반 수 이상이 심각한 당뇨와 스트레스성 고혈압에 노출되어 있고, 약물중독, 알코올중독, 자살률, 영아 사망률은 미국내에서 최고라한다. 또한 냉전시대에 군비경쟁의 일환으로 개발한 우라늄 광산이 있는 지역이기도 해서, 보호 장비도 없이 일했던 원주민들은 방사능 오염으로 다수가 사망하거나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 서남부의 나바호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초상 작업은 바로 이 우라늄 광산 노동자들의 현 실태에 대한 내밀한 기록이다.

그들이 이 저주받은 고향 대륙에서 자취를 감춰버린 절반 이상의 다른 부족들과 같은 운명에 처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그들에게 인권이니 인간의 존엄성이니 하는 말들은 정복자들이 지어낸 허구적 개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생존권 마저 위협받는 상황이니 말이다. 살육의 역사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이 원주민 후예들의 모습은 문명의 야만성에 대한 극명한 상징이다. 자신의 죄악을 덮어버리고 참회조차 하지 않는 문명의 미래는 어떤 것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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